Im Krebsgang, Günter Grass / 게걸음으로, 귄터 그라스
귄터 그라스(장희창 옮김): 게걸음으로, 민음사, 2002
S.38
그리고 나서 수많은 종이들이 인쇄되었다. 볼프강 디베르거가 “비겁한 살인 행위”라고 쓴 것이 소설가 에밀 루드비히에게서는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투쟁”이 되었다. 이러한 대립적인 가치 평가는 디지털 망으로 연결된 현재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재판을 포함하여 그 후에 일어난 모든 과정에서 범죄자와 희생자는 잊히고 새로운 의미가 부각되었다. (중략) 하지만 범행 당사자는 곧 잊혀지고 말았다. 어머니 자신도 어릴 적에 툴라라고 불렸을 무렵에는 그 살인과 살인자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다만 어떤 배에 관한 동화 같은 이야기만 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온통 흰색이었던 그 배는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가득 태운 채 ‘크라프트 두르히 프로이데(KdF)’라는 단체를 위해 장거리 혹은 단거리 바다 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살면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흔히들 언론에 의해서, 혹은 각자 개인에 의해서든 어떠한 ‘명칭’으로서 화두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명칭으로 불린 이후로는 사건의 본질은 잊혀진다. 그 연속된 과정들(이름이 붙음-잊혀짐)은 항상 언제나 정말이지 자연스럽기 때문에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외하고선, 모두가 알지 못하고 또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사건에 붙여지는 이름이나, 이름이 가져오는 파급력이나, 그 이름에게 던지는 나름의 의견들 뿐만이 남을 뿐이다. 이름이 붙여지기 전 그 사건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미필적 고의적로 잊혀진다.
본문의 내용도 이와 같다. 다비드의 총격행위는 ‘비겁한 살인 행위’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투쟁’ 등으로 성격이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들은 각각 내뿜는 이미지가 다르다. 그리고 그 단어를 읽는 사람은 더 맘에 드는 이미지를 선택할 뿐이다. 사건이 부여 받은 ‘새로운 의미’는 의미 부여자에 의해 편협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또 이게 편협하냐 안하냐,를 따지는 사이에 사건의 본질은 잊혀진다. 다비드의 살인에 대한 당당함, 그 자신감의 원천 등은 새로운 의미 부여 과정에서 필요가 없는 소재이기 때문에 탈락된다. 구스틀로프가 시대의 악마라 불리는 히틀러에게 충성했던 과거 또한 마찬가지다. 그에게는 순교자라는 명칭이, 다비드에게는 ‘감히’ 독일인을 쏜 유대인 범죄자라는 명칭만이 남을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 또한 한꺼번에 잊혀지면서, 혹은 기꺼이 은폐되면서 국민을 현혹하는 배는 행복을 태우는 배로 불리고, 동화처럼 구전된다. 이 모든 사건들이 그때 툴라에게도, 후세대에게도 생략되고, 잊혀지고, 미화된다니. 허망하지 않을 수 없다.
S. 86
“그 애는 사회화되기 어려운 전형적인 외톨이예요. 내 동료 선생 몇몇의 말에 따르면, 코니의 사고방식은 전적으로 과거 지향적이라는군요. 겉으로는 아무리 기술적 혁신, 그러니까 컴퓨터와 현대 통신 수단에 흥미 있더라도 말이에요…….”
그렇다! 발트 해 휴양지 담프에서 있었던 생존자들의 만남 직후에 내 아들에게 컴퓨터와 부속품 일체를 선사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그 애를 컴퓨터에 빠져들게 만든 것은 그 애가 겨우 열다섯 살 때였다. 그 애가 어긋난 길로 빠져들게 된 것은 오로지 어머니, 그녀의 책임이다.
S. 92-93
거듭해서 덮어 버리긴 했지만 그 어떤 확신이 재깍거리며 계속 들려왔다. 내 아들일지 모른다. 아니, 내 아들이다. 여러 달 동안 여기에서……콘라트야……저 뒤에는 코니가 숨어 있어…….
오랫동안 나는 내 예감에 의문을 제기했다. 네 혈육이 설마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어느 정도 좌익자유주의적인 교육을 받은 자가 그처럼 길을 잃고 심하게 우익화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중략) 나는 앗, 뜨거라 싶었다. 바로 그 애다! 여기 몇 획으로 간단히 그려 놓은 익살맞은 인물 스케치가 있는 이 웹사이트에서 내 아들이 세계를 향해 동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나는 슈베린 동지회 이름으로, 할머니의 백발 앞에서 맹세를 했어요. 우리 독일인을 영원토록 형벌 기둥에 매달아 놓으려는 것은 바로 세계의 유대인들이라는 진실을, 다름 아닌 진실만을 입증하겠노라고 말입니다…….”
이 페이지들은 툴라도, 콘라트도, 그때 수많은 독일인들도 나치와 히틀러에게 현혹 ‘당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들은 수동적으로 이끌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현혹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닐까? 현혹을 당한 이에게 받는 교육은, 잘못된 신념으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단순히 현혹과 교육 그리고 일방적 주입만의 문제라고만 할 수 있는가? 웹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콘라트도 그저 할머니의 강압적 주입을 받은 순진무구한 피해자일뿐일까? 화자의 말대로 콘라트는 좌익자유주의적 사고의 교육도 받았다. 그럼에도 콘라트는 그와 다른 방향성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툴라의 이념을, 그녀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고 역사라고 믿기로 선택했다. 그렇다. 이건 선택의 문제다. 현혹에 능동적이기로한 선택.
그리고 화자는 이 두 부분에서 콘라트와 깊게 연결되어 있는 어머니를 혐오한다. 그러한 혐오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머니가 말하는 1. 과거에 대한 것일까, 그 과거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2. 어머니에 대한 것일까, 그 어머니의 말만 듣고 그 말만 믿으며 맹세까지 하는 3. 아들에 대한 것일까?
모두 해당된다. 그리고 더불어 이 광경들을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대한 추궁을 받은 화자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도 포함되는 듯하다. 화자에 작가가 자신을 대입시켰다면 그는 그 어느 순간부터, 나치와 독일의 행보가 잘못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부터, 자신의 역량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하는지, 할 수는 있는지를 생각하기만 해도 몰려오는 막막함도 함께.
S. 95
그래, 그렇고말고! 나는 자신의 타락을 안다. 나의 타락을 덮어 두는 것이 얼마나 진땀 나는 일인지도 안다. 나는 제자리에 머물고자 노력했으며, 이편도 저편도 아니려고 한다. 대개 중립적인 입장에 서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로부터든 위임을 받으면 확인 기사만 쓰고 사실 보고만 할 뿐, 자세를 흩트리지 않으려 한다…….
S. 122
그런데 나는? 추모 예배가 끝난 후에 나는 밤의 어둠으로 덮인 바닷가로 슬쩍 사라져 이리저리 거닐었다. 혼자서 아무 생각도 없이. 바람이 불지 않았기 때문에 발트 해도 흐릿하고 맥 빠지는 소리로 철썩 거리고 있었다.
어딘가 내키지 않지만 중립이라는 편에 서서 방관을 멈추지 않는 나(파울)와 동시에 무력감과 허무함만을 느끼는 나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과거를 찬양하는 걸 멈추지 않고, 콘라트는 그녀의 열정을 물려받아 현혹된 자에서 현혹하는 자로서 열심히 살아가는데, 이럴 때에 파울은 무엇을 하는가? 그는 스스로에게 '나 자신은?' 이라고 묻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밤 바람만을 맞는다. 묻고 대답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물은 후 침묵하고 무력함만을 느낀다. 이 글을 읽는 나는 파울과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나도 그처럼 묻는다. 나치에게 동의하거나 반대하거나 하지 않고, 어느 입장도 취하지 못하지만, 애써 중립에 서서 사실만을 말한다고는 하면서 선택할 용기를 저버리지는 않았을까? 나는 이 역사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과연 내 살길을, 내가 조용히 있으면 넘어갈 수 있을 수 있는 이 기회를 저버릴 수 있는가? 결국엔 나도 그처럼 침묵한다. 적어도 나치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옹졸한 자부심은 있었겠지만, 결국 그걸 방관했다는 죄책감으로 질식했을 것이기에.
<게걸음으로> 에서 전쟁을 두 차례나 겪은 후의 독일인들은 '독일인이다'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자로 분류된다. 그리고 언젠가 하나의 사고로 인해 그들 중 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역사 속 가해자였던 그들은 한 사고의 순진무구한 피해자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러한 진실은 역사의 뒤로 숨겨진다. 필히 누군가의 의지로 행해지는 이러한 은폐는 사실상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가했던 학살의 논리와 비슷하다. 아이러니다. 그들이 행했던 잔혹사의 구도가 그들에게 덧씌워져 다시 재생된다. 아직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이 메커니즘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의 탈출을 꾀한다. 오히려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을 바라보기를 역설한다. 마땅히 죽어야 할 인간이 있는가? 독일인들이 과거에 가해자였다해도 그들의 죽음이 은폐되어 마땅한가? 5000명 모두가 가해자인 것도 아닐 뿐더러, 설상 그렇다 해도 가해자였던 '사실'이 사고로 인한 죽음이라는 '진실'을 덮어서는 안된다. 은폐되어서도, 조작 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선택하고 자행한다. 덧붙여 침묵한다.
그 선택의 결과는 1세대의 광신도적인 면모, 2세대의 방관, 3세대의 살인으로 나타난다.
광신도, 방관자, 실행자의 탄생.
툴라는 파울에게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써달라고 요청한다. 그녀에게 과거는 찬란한 행복의 여행이었다. 그러나 배 아프게 낳아놓은 아들이란 녀석은 간곡한 부탁을 외면하기만 한다. 그 아들 파울은 그녀의 이야기를 대신 말하는 것을 거부하며 그녀와의 연결을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그'라는 인물에게서도, 엄마에게서도 받는 압박은 그에게 펜을 쥐어준다. 뭔가를 쓰기는 쓴다. 다만 그녀의 입장에 서지는 않는다. 침묵과 방관도 일삼는다. 구스탈로프 호는 툴라에게는 희망의 배였지만 파울에게는 침몰당한 배에 불과하다. 그러나 배는 그가 거친 파도와 끝없는 추락으로부터 생존한 곳이기도 하다. 파울의 아들 콘라트는 작품 내에서 툴라의 환상을 이어받은 실행자다. 회색 인간과도 같은 아버지 파울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결국 한 세대를 건너 뛴 '물들임'은 파국을 맞는다.
여기서 침묵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방지가 아닌 반복의 양상을 띄운다.
'독일인이기에 쏘았다'
'유대인이기에 쏘았다'
골리앗에게 감히 덤벼보던 다윗의 말은 제 후손을 죽인 골리앗의 후손에 의해 다시 반복된다. 이러한 반복은 왜 아직도 현재의 이야기인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스운 정당화가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정말 끝난 일이 맞냐고, 완결이 되었냐고. 완결성의 정의는 뭔데? 하고.
완결된 것이 아니다. 은폐는 완결의 성질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관용의 탈을 쓴 68세대들의 선심이자 무책임한 방관은 해결책의 공백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그'로 출연해 파울에게 글을 쓸 것을 요구한다. 쓰는 것은 곧 폭로다. 인간 본연의 문제로 봄으로써 오히려 차별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장치를 경계한다. 가해자였던 존재였음에도, 그 존재성이 바뀐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하더라도' 이야기 해야한다.
1. Krebsgang
시간이 가진 직선적인 면모나 연속성만을 보는 것이 아닌, 동시대를 훑으면서도 횡적으로 움직이는 게걸음. 행복의 선전으로 쓰였던 배의 침몰에서 살아남은 산 증인으로서 걷는 게와 같은 걸음. 파울은 왜 이렇게 옆으로 돌아서서 걸을까? 그는 분명 자기 탄생과부터 연관이 되어있고,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성에 대해 될 수 있으면 회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자신의 아들 콘라트가 그 비극을 반복하는, 다시 또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무한 루프를 개척해나가는 선지자로서 감옥에 갇혀있으니까. 그의 게걸음은 1세대에게 일방적으로 전쟁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Der Vorleser>의 따뜻한 시선보다는 확실히 조금 온도가 낮다. 조금 차가워도 괜찮아, 이야기하기 껄끄러워도 괜찮아. 어떻게 보면 위로 아닐까?
2. Vergegenkunft
'VERGEGENKUNFT' : VERGANGENHEIT + GEGENWART + ZUKUNFT
<게걸음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는 결코 분리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2,3세대가 말하는 것이 각각의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과 더불어 모두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삼각형의 반복.
3. Erinnerungsarbeit
회상작업. 그 중에서도 고통스러운 회상 작업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 저주이자 축복이다. 둘 중 하나로 규명할 수 없다. 저주임에도 불구하고 축복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단순히 역사 속으로 은폐되어서는 안된다. 그 뒤로 숨겨버리기만 해서는 안된다. 시지포스의 무한의 바위 올리기 형벌처럼 계속 해야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불편하더라도, 그 과정 속에서 오해를 받아 고통스러울 수 있더라도 처리내고 결론내서는 안된다. 끝날 때 까지 끝난 게 아니다.
+Internet-blutzeug.de
네트워크와 인터넷은 지금의 시대를 보여준다. 3세대인 콘라트에 이어서 앞으로 이어나갈 세대들이 사는 세상. 시공간을 초월하는 네트워크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을 덜면서 Vergegenkunft와도 맞물리는 개념이다. 정리, 결론,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닌 시대. 언제고 다시 열어볼 수 있는 시대. 양날의 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