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f mich bei deinem Namen

8. E des Sommers

아스프빌즈 2022. 6. 10. 02:04

 

 

그해 여름을 돌아보면 '불'과 '까무러칠 정도의 황홀함'을 감수하려고 무던히 애써야 했지만 여전히 삶은 행복한 순간을 가져다 주었다. 이탈리아, 여름. 이른 오후의 매미 소리. 내 방. 그의 방. 온 세상을 차단해 버린 우리의 발코니. 정원에서 계단을 지나 내 방까지 부드럽게 나부끼며 올라오는 바람. 내가 낚시를 좋아하게 된 여름. 그가 좋아하니까. 조깅을 좋아하게 된 여름. 그가 좋아하니까. 문어와 헤라클레이토스, 트리스탄을 좋아하게 되고 새 울음소리를 듣고 식물의 향기를 맡고 화창한 날 발아래부터 올라오는 옅은 안개를 느낀 여름. 모든 감각이 항상 깨어 있어서 언제라도 자동으로 그에게 달려갔기 때문이다.

 


 

 

나는 곡의 어느 부분이 그를 동요시켰는지 정확히 알았다. 매번 그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곡을 연주했다. 정말로 그에게 헌정하는 곡이었으니까. 내 안에 자리한 아름다운 무언가의 표시였다. 헤아리기 어렵지 않은 그것은 나를 긴 카덴차로 내몰았다. 오직 그를 위해서.

 

·······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연주할게요, 그만 하라고 할 때까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내 손가락이 벗겨질 때까지. 난 당신을 위해 뭔가 해주는 게 좋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 말만 해요.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았어요. 친근하게 다가가는 나에게 또다시 얼음처럼 차갑게 반응할 때조차. 우리 사이에 이런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 눈보라속에서 찬란한 여름을 되찾을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절대로 잊지 못할 거에요.

 

 


 

 

오늘, 통증, 감정의 부추김, 새로운 사람에 대한 흥분감, 손끝 너머에 있을 게 분명한 커다란 행복, 속마음을 잘못 읽을수도 있고 잃고 싶지도 않으며 항상 예측이 필요한 사람들 주위에서 보이는 내 서투른 행동, 내가 원하고 또 간절히 나를 원하기 바라는 사람들에게 쓰는 절박한 간계, 세상과 나 사이에 자리하는 듯한 라이스페이퍼처럼 얇은 미닫이문 같은 몇 겹의 장막, 애초에 암호화되지도 않은 것을 변환하고 또 해독하려는 충동······ 이 모든 것이 올리버가 우리집에 온 그 여름에 시작되었다. 그것들은 그해 여름에 유행한 곡과 그가 머무는 동안 그리고 떠난 후에 읽은 책들, 뜨거운 날의 로즈메리 냄새부터 오후의 요란한 매미소리까지 모든 것에 새겨졌다. 여름마다 접해서 익숙해진 냄새와 소리들이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고, 그 여름의 사건들로 영원히 다른 색조를 띄게 되었다.

 

 


 

 

그해 여름을 돌아보면 사건의 순서가 잘 정리되지 않는다. 중요한 장면이 몇 개 있다. 그 밖에 기억나는 것들은 순간의 '반복'이다. 아침 식사 전후의 일과. 잔디밭이나 수영장가에 누운 올리버. 전용 테이블에 앉은 나. 그 후에 이어지는 수영이나 조깅. 그러고 나면 올리버는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번역가를 만나러 간다. 차양이 달린 커다란 야외 테이블이나 집 안에서 손님 한둘과 함께 하는 길게 늘어진 점심 식사. 태양과 침묵이 있는 멋지고 푸른 오후 시간.

 

 


 

 

 

 

시내로 향하면서 올리버가 천천히 움직이는 걸 알 수 있었다. 평상시대로 속도를 내지도 않고 운동선수 같은 열정으로 오르막길을 힘껏 오르지도 않았다. 빨리 원고 작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색도, 친구들이 해변으로 가거나 평상시처럼 나를 외면하려는 기색도 없어 보였다. 어쩌면 달리 할 일이 없는 걸 수도 있었다. 나에게는 이런 순간이 천국이었다. 아직 어렸지만 그런 순간은 영원하지 않으므로 있는 그대로 즐겨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와의 우정을 단단히 하거나 다른 차원까지 끌어올리려는 어설픈 시도로 망치지 말고. 결코 우정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첼란의 표현처럼 항시와 전무사이. - Zwischen Immer und Nie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광장에 도착하자 올리버는 담배를 사기 위해 멈추었다. 그는 골루아즈를 피우기 시작한 터였다. 피워 본 적 없는 브랜드라 나도 한 대 피워 봐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가 성냥개비 하나를 꺼내 내 얼굴 가까이에서 양손을 동그랗게 모아쥐고 담뱃불을 붙여주었다.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네요.

 

그를, 오늘을 떠올리는 담배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한달도 되지않아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테니까. 그가 B에서 지낼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세어 보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열정도 쾌락도 아니었다. 어쩌면 증거를 원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말도 필요 없었다. 잡담, 진지한 토론, 자전거 타면서 나누는 대화, 책 이야기 전부 다 필요 없었다. 그저 태양과 풀밭, 때때로 부는 해풍, 그의 가슴과 목과 겨드랑이에서 풍기는 체취만 있으면 된다.

그저 나를 데려가 허물을 벗겨서 오비디우스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처럼 완전히 바꿔 주기를 바랐다. 올리버, 당신의 욕망을 담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눈가리개를 해 주고 내 손을 잡고서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 줄 수 있어요? 

 

 


 

 

그 시절을 돌아보면 조금의 후회도 없다. 위험천만한 모험이나 수치심,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통찰력 그 무엇도 후회되지 않는다.

서정적으로 비추는 햇살, 한낮의 강렬한 열기에 고개를 꾸벅거리는 커다란 식물로 가득한 들판, 나무 바닥이 끽끽거리는 소리나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대리석 평판으로 재떨이를 살짝 미는 긁히는 소리.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제한적이었고 감히 헤아려 보지도 못했고 끝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았지만 굳이 이정표를 살펴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돌아오는 길을 위하여 빵가루를 흘리는 대신 다 먹어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