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Verwandlung ,Franz Kafka / 변신, 프란츠 카프카
<고정-상태의 이미지와 운동하는 의미>
05.10.2016
1. 특수한 상황의 전개
이 작품은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한 사건을 기점으로 한 '고정적인 것들의 변동'을 이야기한다. 벌레로의 변신이라는 특수한 사건으로 전개되는 이 상황들은 그에 대처하는 각 인물들의 행동 방식과 그 변화를 보여준다.
우선, 이 사건은 일상적으로 익숙해진 생활에 대한 회의감 혹은 새로운 시각이라는 연결이 어려운(걸핏하면 반대지점에 놓여졌다고 봐도 무방한, 혹은 그렇게 느끼기 쉬운) 두 대치점을 제공한다. 예컨대, 그레고르가 개인의 자유를 희생한 채 가족들을 위해 직업적으로 고군분투 하는 모습 등은 그레고르가 직업을 가진 이후 그의 가족들에게는 당연하고도-매우 익숙한 상황이다. 그의 고된 직업 생활은 그의 가족에게 어떠한 희생은 물론, (굳이)의식하는 대상조차로도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건'이 발발한 이후 가족들은 큰 혼란에 빠진다. 매우 비현실적인 상황이 현실에 던져졌을 때, 그들은 '왜?' 가 아닌 '왜!'라 외친다. 그레고르가 '왜' 벌레로 변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하지 않고, 느낌표에 원망의 무게를 실어 그를 힐난할 뿐.
2. 가족이라는 결합체(고정적이었던)가 가진 의미에 대한 회의감과 존재성의 변화-변질
그레고르는 분명 아버지의, 어머니의, 누이의 가족이다. 그런 그가 벌레로 변했을 때 가족들은 마음 아파하는 건 잠시고 바로 집안의 재정상태를 논하고, 멀지 않은 훗날엔 그를 적대시하고 두려워하며, 말미엔 그를 어떻게 쫓아낼 지에 대해 상의하기까지 한다.
S.92
"우리는 저것한테서 벗어나야만 해요.”
“저것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말 거예요. 뻔해요. 우리처럼 죽도록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집에까지 와서 왜 이 끝나지 않는 고통을 견뎌 내야 하는데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니?”
이들이야말로 '진짜' 가족이 맞는가? 진짜 가족이 이토록 냉정할 수 있을까? 단 한순간이라도 마음을 아파하지도 않을까?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물은 이 가족에게 입양되었다거나, 출생의 비밀을 가진 건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언제부터 '진짜' 가족이었는지, 아닌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는 물음표에는 이 모든 질문들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위 장면은 ‘가족’이라는 집합이 근대 사회에 들어선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견고하고 잔인한 단면 속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무한한 질문이 꼬리를 문다. 이를테면: 가족이 가진 결속력의 진정성이 무엇인가? 가족이란 과연 본능적 사랑으로 영원한 관계인가? 애초에 그럴 수가 있는 성질인가? 가족의 본래의 의미는 무엇인가? 태초부터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했는가? 변한다면 어떻게? 혹은 어디까지? 언제까지? 등의 수많은 질문을 받는 집합체. 한 의미로 단정지을 수 없는, 끊임없이 복합적이기만 한 단체.
이러한 질문은 원망이고 책망이며 그 누군가를 끝없는 의심의 굴레로 자행해서 들어가게끔 한다. 이렇게 가장 사랑받던 이에서 가장 기피해야 될 대상이 된 이 상황은 고정적이던 '가족'(그레고르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란 존재에게 자꾸만 의문점을 던진다. 애초에 그들이 그에게 보여주었던 사랑은 본능적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가족이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여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리액션이었을 수도 있다. 새상품에 달린 가격표처럼, 무조건적으로 달려있어야하는. 그래야만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을 하는 대충 그런 정도의 마음.
하지만 어쩌면 정말 사랑이었을 수도 있다. 뭐가 됐든, 뭐였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현실. 그 모든 현실이 과거형에 갇혀있을 뿐이다. 어쩔 때는 우화일수도, 풍경일 수도, 역사일 수도, 비밀일 수도 있지만. 역시나 그것 또한 중요하지 않다.
이 작품은 그 현실을 '변신'이라는 비현실로 풀어간다.
20세기 초, 근대라는 시대에서 가족이 갖는 의미와 진정성은 더 이상 그 ‘자체’만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은 더이상 하나의 일관되거나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다. 무한한 혼란을 내재한 채 가족의 뿌리를 무참히 흔들고 뽑아낸다. <변신>에서 혈연관계이기 때문에 당연시 여겼던 자신의 자유보다 우선시했던 가족의 경제 상황, 그 일원들을 고려한 그레고르의 투철한 직업생활, 그리고 그가 인간이었던 시절, 서로를 잘 챙기던 그레테의 남매애는 순식간에 휘발한다. 그가 지녔던 응당성의 무게감보다 더 무겁고, 그렇지만 훨씬 빠르게.
(S.49) '식구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돈을 받았고 그레고르도 기꺼이 돈을 내놓았지만, 서로 간에 애틋한 온정은 더 이상 오가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가족이 갖는 고정적인 혈연에 의한 사랑, 본능에 의했다면 사건 이후 그들은 변함없이 그레고르를 반겨주고, 아껴주고, 그를 회귀를 위한 노력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본능적인 사랑에서는 퇴색된 가족이었다. 그들의 더욱 냉담해진 태도는 단순히 벌레로의 변신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가 벌레로 변함으로서 가져오는 영향력들(경제 활동 주체의 변화와 그에 따른 혼란 등)과 필연적으로 관계한다.
그러나 근대-현대사회에 이르러서 이들의 냉담한 태도는 과연 비난받아 '마땅'한가? 그것이야말로 당연한가? 그레고르 잠자가 가족에게 했던 희생만큼 당연한가? 그걸 지적하는 이는 얼마만큼의 고정적인 사랑으로 가족과 이 현실을 살아가는가?
비현실이 현실을 비추어 그 깊은 골을 드러낼 때에, 나는 그 골에 한발자국마저도 걸치지 않았는가? 나는 오로지 완전무결한 가족의 사랑안에서 자라는 인간인가? 나의 가족도 그러한가?
이 사회에서의 희생은 더이상 고결하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그레고르의 것처럼 당연하고, 억울하다. 하지만 희생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을 감안하고 감수하는 것. 우리는 이 안타깝고도 불공정한 횡폐의 반복을 일상으로 삼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그레고르 잠자이자, 그레테이자, 어머니이자 아버지이자, 못된 상사이다. 우리는 언제나 고정적일 수 없고, 언제나 운동한다.
3. 개인의 변화
<변신>에서 캐릭터성을 변화시킨 인물들은 대표적으로 그레고르, 그레테, 아버지 등이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에서 사람들은 더이상 시골 및 소도시에서 감정을 교류하며 온정을 나누던 이웃들이 아닌, 발전하는 사회, 기계의 등장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서로 기꺼이 경쟁자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에 따라 개인은 주체적으로 감정, 온정, 마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효율, 이율, 합리성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끌리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차 시간에 연연해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1.그레고르
S.12
'맙소사! 여섯시 반이었다.
S.13
다음 기차는 일곱 시에 있다. 그 기차를 타려면 이만저만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벌레가 된 걸 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출근 시간에 초조해하는 그레고르의 모습. 존재의 변화보다는 단순히 다가오는 출근시간, 업무를 두려워하는 그레고르. 누구나 이걸 보고 '말이 돼?' 라고 생각할테지만 그는 지금 어떻게 출근해야하는 지만을 생각하고 있다.
S.19
아침에 단 두어 시간 만이라도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멍해져서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게 되는 사람
S.31
“지금 당장은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지만 오히려 이런 때야말로 과거의 실적을 기억해주시고…(중략)"
이렇게 시간에 의해 움직이고,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단위에 맞춰 생활하던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후 더 이상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자신이 인간이었을 적, 아무리 바쁘고 시간과 회사에 쫓겨 살아도 방문을 잠그던 버릇이 있다는 것에 감사를 할 정도로, 벌레가 된 비극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그 자유를 느끼고 있다. 깊디 깊은 불행 속에서 느끼는 아주 조금의 행복한 자유라니. 벌레가 되야만 느낄 수 있는 자유라니.
2. 그레테
그레테는 이 집안에서 그저 어린 여자아이로만 여겨졌던 존재였다. 그러나 '사건' 이후 그녀는 가족의 의견을 선도하는 주동자의 역할을 해낸다.
(S.92) “우리는 저것한테서 벗어나야만 해요."
(S.93) “내쫓아야해요! 그러는 수밖에는 없어요, 아버지! 저것이 오빠라는 생각은 떨쳐 버리셔야 해요. 어떻게 저것이 오빠일 수 있어요?"
그레테는 그레고르를 사랑해마지않는 오빠에서 '저것'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그의 존재에 대해 완전한 부정을 시작한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 변화를 단순히 벌레인 그레고르를 보살피기 힘들어서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녀는 매우 극단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레테에게 그레고르는 이제 단순히 ‘저것’에 불과할 뿐더러 오히려 벗어나야하는 기피대상이다.
이런 급격한 태도 변화는 그녀가 어린 여자아이, 음악을 하고 싶어하지만 강하게 의견피력을 하지 못했던 아이라는 고정적 이미지로부터 적극적으로 탈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활동으로 가족을 먹여살린 오빠의 부재에 대한 강하고도 주체적인 부정의 태도가 그에 해당한다. 그레테에게 ‘오빠’란 단순히 혈연관계에 한한 것이 아니라, 경제활동의 주체로서 가족을 살리는, 그로 인해 가족으로서의 애정을 확인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오빠는 없다. 집안의 거대한 벌레만이 있을 뿐.
그레테라는 인물의 입장에서 이 상황은 어찌보면 한 여인의 성장과정이다. 지나가는 엑스트라 1에 불과했던, 작고 소중한 꿈을 이끌고 희생하는 오빠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는 그럭저럭한 여동생에서 '선도자'가 된 거니까. 이 과정은 매우 짧으면서도 강력해서, 그에 비례하는 운동성을 가진다. 빠르게 그레고르 잠자라는 존재성을 지우고, 더 빠르게 벌레 따위, '그것'에 대한 혐오감을 일깨우는 모든 움직임. 과거는 나쁜 것이고, 우리는 이제 그 나쁜 과거에서 탈출해서 우리끼리 똘똘 뭉쳐야하며, 더 좋은 미래를 위해 움직여야한다 등의 메세지까지 확장될 수 있는 캐릭터. 낯설지 않다.
3. 아버지
(S. 68) 지금 아버지는 꼿꼿하게 서 있지 않은가! 그는 은행 사환처럼 금 단추가 달린 빳빳한 옷깃 위로는
(…중략…)
평소에 헝클어져 있던 흰 머리칼도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가르마를 타서 반짝반짝 윤기를 내며 단정하게 빗겨져 있었다.
그레고르가 회사근무를 마치고 온 후면 무기력하게 반겨주던, 걸음이 느려 사람들을 불러 세우던 아버지는 재취업을 했다. 그로 인해 그저 보통 늙은 아버지에 불과했던 그는 가족의 권력을 다시금 잡고 가부장적 인물로 재등장한다.
4. 자본주의 사회의 등장
(S.31) 직물 가게에서 보낸 옷 견본의 포장이 뜯어진 채 흩어져 있는 책상 위에는 얼마 전에 삽화가 들어간 신문에서 오려 낸 그림이 걸려 있었다. 예쁘게 도금이 된 액자에 넣어진 그림이었다. 모피 모자와 모피 목도리를 두른 여인이 정자세로 앉아 있었고 보는 사람의 눈앞으로 들어 올린 팔꿈치 아래까지 모피 토시에 싸여 있었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 겉치장과 계산기와 숫자가 오가는 세상. 시간은 효율이고, 효율은 돈이고, 돈은 행복인 사회. 안타깝고 구슬프지만 이제는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겨울에는 모피를 두른 여인이 행복한 인간이고, 액자는 더욱 더 반짝여야하고, 액자안의 그림은 한정판이고 희귀본이어야하는 세상. 그 모든 것들이 내 가치로 스며들어 나를 완성하는 세상. 자본주의 사회는 더 빠르고 바쁘게 우리의 존재성을 퍼즐맞추듯이 바꾸고 제안한다.
5. 영원한 상태도, 영원한 운동도 없다.
내 안의 본질은 유일한가? 나를 딱 하나 존재하는 무언가로 정의할 수 있는가?
혹은 나는 영원히 변화하는가? 나는 이랬다가, 저랬다가를 영원히 반복하며 챗바퀴 안에서 죽을 때까지 운동하는가?
내가 평가하는 나는 정답인가? 합리화는 아닐까? 내가 나를 봐주고, 남들을 속이며 거짓된 나를 소개시키고, 그 보람으로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뿌듯해하며 잠들지 않는가? 어쩔 수 없었다 라는 말을 달고 살면서 다른 선택지를 거들떠 보지도 않지 않는가? 혹은 이미 지나갔다며 시간을 핑계삼지는 않는가?
인간은 영원할 수 없기에 영원히 고정될 수도, 그렇다고 영원히 움직이고 변화할 수도 없다. 적어도 이 '현실'안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