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Irrealis

<로메르와 함께 한 저녁시간-클로에 혹은 오후의 불안> : Herr.

아스프빌즈 2024. 2. 27. 22:32



<로메르와 함께 한 저녁시간-클로에 혹은 오후의 불안> 

S. 201-202

 


영화관 밖으로 걸어 나오는 시간이 악몽같았다. 우리에겐 영화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없었다. 3번 애비뉴로 걸어가 작은 중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뒤 그녀에게 택시를 잡아주었고 그녀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 주 후반에 전화를 걸어 또 영화를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주말에 가야 할 곳이 있다고 대답했다. 그 후 우리는 1년이 지나도록 연락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가 로메르적이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던 이유를 깨닫는 데 일주일 정도가 걸렸다. 로메로적이려면 잘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는 남자와 여자여야한다. 예전에 두어 번 만났거나 둘 다 아는 친구가 몇 명 있었지만 서로 가까워지지도 않았고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도 없던 사이여야 한다. 로메르의 작품이 늘 그렇듯 지금 두 사람이 함께 있도록 만드는 계기는 사실상 운이다. 누군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두 사람을 소개해 준다거나 두 사람이 우연히 해변가 같은 별장에 여름 손님으로 왔거나 <오후의 연정>처럼 한 사람이 딱히 용건도 없이, 어쩌면 순전히 권태감이나 일시적 기분이 발동해 상대방을 찾아가는 식이다.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가 누그러지면서 갑자기 두 사람은 함께 있는 걸 즐긴다. 심지어 꺼려지기도 하고 우정이 선을 넘길 기대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상태여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불이 붙었다 해도 얼마 못 갈 불꽃이며 서로가 곧 완전한 타인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열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두 승객이 단지 상황상 필요해서, 또는 흑심을 품은 건 아니지만 달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라서 장난치듯 관심을 끄는 것과 같다. 이 경우 어떤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만나다보니 마음이 끌려 두 사람은 진심을 털어놓는다. 자신은 숨기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던 이들도 용기가 없어 털어놓은 적 없는 진심을. 솔직함과 용기는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서로 거의 모르는 사람이라 다시 만날 일이 없어서 극히 개인적이고 시시콜콜한 얘기를 털어놓기가 쉬운 두 사람 사이에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