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o Irrealis

<로메르와 함께 한 저녁 시간 - 클레르 혹은 안시호수의 소소한 소란> : Wie sie sagen oder verstecken seine Liebe

아스프빌즈 2024. 4. 24. 00:48

 

 

<클레르의 무릎(Le Genou De Claire), 1970>

 

 

 

 

S.179

로메르는 이단아다. 나도 이단아였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이단아의 기질을 보면 정말 좋았다. 우리 사이의 연관성이 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연관성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중략… 솔직함에는 약간은 어렵고 어색하고 거북한 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로메르의 작품에서 로맨스는 언제나 차갑게 식은 격정으로 표현된다.

 

 

 

S.184

어린 뱅상은 딱 봐도 로라를 좋아하는 티가 나는데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고, 로라는 곧잘 자신의 감정에 대해 지극히 고상한 어조로 말하고, 또 오로라는 모든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데 한 남자에게 정착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논리로 독신 생활을 정당화한다.

 

"운명이 내 길에 아무 것도 놓아 주려 하지 않으니 아무 것도 잡지 말아야죠. 뭐 하러 운명에 맞서 싸워요?"

 

 하지만 이를 자기기만이나 궤변이라고 일컫는 것은 잘못된 생각일지도 모른다. 이 인물들은 아주 정직한 동시에 아주 가차 없는 통찰력도 있어 꼭 빠져들지 않아도 될 자기기만 위에 불안정하게 서있는 것이다. 로메르의 모든 영화는 마지막 부분에 한 인물이나 모든 인물이 자신의 환상을 바로잡는 순간이 나온다. 로메르의 인물들은 지적으로 종잡을 수가 없는데, 가령 어떤 인물이 자신의 불안감을 감추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밀탐해 원색적 욕망의 뉘앙스를 풍기는 모든 걸 중간에서 가로채 꺼 버리는 기술을 완벽히 해낸 것인지 딱히 분간하지 못하는 식이다.

 

중략…

 

로메르는 이단아다. 그의 영화 속 인물은 모두 반직관적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이성적인 이해보다 반사실적 시각을 통해 더 많은 진실이 발견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욕망은 소유한 이후가 아니라 소유하기 이전에 오는 것이 정상이다. 기다림의 경우도 기다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것이 로메르의 인물들이 삶을 읽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역설을 열쇠로 삼아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을 벗어던지거나 의문을 제기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로메르의 시각은 도치(倒置)에 따라 작동한다. 확실히 로메르는 파스칼의 renversement perpétuel du pour au contre(찬반의 끊임 없는 역전)에 바탕한 것이 아니면 관심이 가는 건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S.196

이 영화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만 정말 그런지 확신이 들지 않거나 나 자신도 전적으로 이해되지 않아 그 얘기를 친구들에게 털어 놓을 수 없었다. 몇 발자국 거리에 해변이 펼쳐진 언덕 위 그 집에 계속 살았다면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었던 내 이야기였다. 나는 영화를 통해 내가 장 클로드 브리알리가 연기한 그런 인물이었다면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를 보았다. 내가 그와 나 사이에 일어난 그 일을 가장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은 나 자신을 그의 버전으로 보는 거였다. 그렇게 될 수도 있었지만 되지 않았고 앞으로 그렇게 될 일도 없겠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실재적이지는 않으며 여전히 그렇게 될 희망은 있으나 결코 되지 않을까 봐 초조한 그런 버전의 나를. 비현실적인 나를. 수년 동안 더듬더듬 찾아다닌 나를.

 

 내가 로메르의 이단아적 통찰과 반 사실적 세계관을 좋아했다면 그 이유는 다른 모든 사람이 말하는 실재적이고 사실적인 세계에 그도 나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가 아는 세계의 좋은 것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세계에서 떠내려온 유목(流木)으로 내 세계를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