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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첫번째 모순, 안진진의 사랑

 

안진진이 억척스러운 엄마보다 고결하고 사랑스러운 소녀 감성의 이모를 더 사랑했냐 묻는다면...나는 비겁하게도 '안진진은 제 온 마음을 다해 엄마를 사랑했다'고, 단지 그뿐이라고 얼버무리겠다. 안진진은 잘 사는 부잣집 이모를 사랑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엄마와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닮지 않은 그녀를 사랑했다. 안진진이라는 나의 존재를 알아주고, 나와 같이 낄낄대고 장난치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는 게 당연해 보이는 부잣집에서 자신은 유행가를 좋아한다며 유치한 시대 가사를 흥얼거리는 솔직하고 경쾌한 그녀를, 안진진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그러나 제 어미보다 이모를 사랑했냐고? 시장 바닥에서 팬티를 팔고, 학교에는 꽃바구니 하나 사올 낭만이라곤 쥐뿔도 없는 엄마보다 더? 콧구멍만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인간 행세를 하고 있는 나에게 고마워하는 티를 내지도 않고, 그야말로 이모처럼 내 존재를 알아주지도 않는 엄마보다 더?

 

안진진은 이모를 사랑했다. 아마도 엄마도 사랑했겠지.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나오는 전제는 <안진진은 엄마를 창피해한다>다. 안진진이 이모를 사랑한 것과 같이 그것 또한 사실이다. 안진진은 적은 월급으로 즉흥적으로 택시를 타고, 꽃까지 산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마와 이모의 생일인 그 날, 이모에게 꽃을 준다. 엄마는 꽃을 사온 자신을 보면 날이 선 타박부터 줬을 거라며 너무나도 당연한 측은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엄마의 생일을 외면한다. 이모는 그런 진진에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고, 단순히 고마움을 가진 게 아니라 그걸 표현할 줄 아는 어른이다. 그래서일까. 안진진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차려입고 값비싼 선물을 받는 이모를 제 엄마라고 속이기 까지 한다. 

 

요망한 딸년. 새빠지게 키워봤자 소용도 없다. 안진진의 엄마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억척스러운 욕지기로 제 딸이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렸다는 사실을, 그것도 심지어 자신과 똑같이 생긴 동생으로 덮어버린 것에 대한 배신감을 휘발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진진의 그런 거짓말이, 죄책감이 어찌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신혼시절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술 먹고 행패를 부리는 남편을 매몰차게 져버리지도 않고, 삶을 살아감에 있어 이렇다할 목표의식 하나 없이 티비에 나오는 조폭 코스프레만 하는 막내아들 밥을 챙기라고 진진에게 신신당부하는 어머니를, 그녀와 이토록 반대의 삶을 사는 이모로 속인 게 뭐 얼마나 사랑이 아닐 수 있는 건데. 엄마를 창피해하면 엄마를 사랑한 게 아닌게 되는 건 아니잖아. 창피해할수도 있고 동시에 사랑할 수도 있잖아. 

 

안진진은 그녀와 엮인 모두를 사랑할 만큼 사랑하고, 창피해할만큼 창피해한다. 밖으로 나도는 이 집구석 남자들을 죽어라 원망하지도 않는다. 술에 절어 고뇌로 망가진 제 자아를 퍽이나 낭만스러운 말로 포장하는 제 아비도, 비에 젖은 '비둘기' 하나로 제 인생을 막장 드라마로 말아먹는 남동생도, 간신히 기초 일본어 인사를 뗀 어머니가 사고 친 가족들을 뒷수습하느라 다음 계절 인사를 외우는 것도 모두 걱정한다. 이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1인분을 하며 건실한 회사 생활하는 자신의 가치를 엄마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소리쳐 울부짖지도, 홧김에 가출하지도 않는다. 안진진이 자신의 가족들을 창피해하는 건 딱 거기까지다. 안진진은 모든 상황의 결정적인 답은 책에 있다며 우직한 책 한권을 쥔 엄마를 보고 치열하게도, 아주 바쁘게도 산다고 말한다. 집 나가 정신머리는 두고 온 아버지에, 비에 젖은 비둘기 하나 때문에 감옥에 가있으면서도 여전히 대부 코스프레를 하는 막내 아들을 모두 건사하는 그녀야말로 안진진의 말을 빌려 쓰자면 아주 바쁘고도 열정적인 여성인 거다. 

나는 그 대목에서 엄마에 대한 안진진의 사랑을 절절히 느꼈다. 아주 바쁘고도 바쁜 엄마를 사랑하는 안진진. 가끔은 조금 덜 바쁜 이모의 삶을 들여다보고 동경도 하는 안진진.

 

안진진의 아버지는 그녀를 꼭 이름 석자로 불렀다. 마냥 동갑내기 친구를 대하듯이. 내려오는 노을이 얼마나 슬픈지 얘기하던 아버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편지로 꾹꾹 눌러 낸 이모. 언제나 너무 치열하고 그 치열함의 해답을 동네 서점 책 한권으로 타파하려는 엄마. 안진진이 아니고서는 누가 이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그들에게 가진 모든 모순 된 감정은 감히 사랑에서 기인한 거라고, 겨우 첫번째 완독을 마치고 지껄여본다. 작가는 독자가 이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통근길 2일차에 모두 다 읽었다. 되새김질을 하며, 필사를 하며 이 '모순'을 다시, 천천히 읽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