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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두세번이면 많이 애쓴다고 볼 수 있다 의 정체성을 가진 일기장 (제목 그대로를 품은) 아주 불경하고도 괘씸한 게으름. 내가 생각하는 것들이 진짜일까 싶을 때 나는 내가 겪었던 것들을 회상한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 10년이 지났다. 아직 나는 뒤돌아보곤 한다. 후회는 아니다. 결코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지언정,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나를 알기에 아니라고 한번 더 호소하고 싶다. 내가 겪었던 아주 찰나 같은 베를린. 처음으로 세상에 말을 건 고향 같은 곳. 나는 그곳으로의 귀향을 꿈꾼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의 편안함을 보장하기 위해 그 귀향을 미루는 나를 유체이탈한 또 다른 내가 볼 때에 나는 나를 나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나의 치부를 나만큼 잘 알고 있는 인간도 없지만 그런 어색함은 언제나 날이 서있고, 서늘하게 내 뒤통수에 찬바람을 불어댄다..
첫번째 모순, 안진진의 사랑 안진진이 억척스러운 엄마보다 고결하고 사랑스러운 소녀 감성의 이모를 더 사랑했냐 묻는다면...나는 비겁하게도 '안진진은 제 온 마음을 다해 엄마를 사랑했다'고, 단지 그뿐이라고 얼버무리겠다. 안진진은 잘 사는 부잣집 이모를 사랑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엄마와 닮았으면서도 동시에 전혀 닮지 않은 그녀를 사랑했다. 안진진이라는 나의 존재를 알아주고, 나와 같이 낄낄대고 장난치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는 게 당연해 보이는 부잣집에서 자신은 유행가를 좋아한다며 유치한 시대 가사를 흥얼거리는 솔직하고 경쾌한 그녀를, 안진진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그러나 제 어미보다 이모를 사랑했냐고? 시장 바닥에서 팬티를 팔고, 학교에는 꽃바구니 하나 사올 낭만이라곤 쥐뿔도 없는 엄마보다 더? 콧구멍만한 집안에서 유일..
일부러 연말 연초에 쓰는 건 아닌 일기 새해가 되기 1분 전. 버스를 타고 가고 싶었지만 10분을 기다려야 한단다. 원래 같으면 당연히 기다렸다가 탔겠지만, 춥지 않아서 나답지 않게(?) 걷기로 한다. 서울 시내가 아니라 조용한 건지, 다같이 묵념을 하느라 고요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고요하고 까만 00시 1분 전. 뒤집어 쓴 후드 위에 두툼한 헤드폰 쿠션 사이로 흘러나오는 윤상의 2집, 샛노란 앨범커버를 뚫고 나와 알알이 박히는 가사의 음절들. 가사가 좋으면 응당 멜로디까지 좋아지기 마련이다. 작년과 새해,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을 나누는 1분이라는 찰나. 19살에서 20살로 넘어갔다고 해서 ‘어른’이 된 건 아니지만 남들이 모두 나보고 어른이라고, 책임지며 살아야한다며 뜬 구름같은 소릴 듣는 것과 같은 순간. 12월 겨울의 한파는 없다. ..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의 대화 1951-1998, "Voir est un tout" Henri Cartier-Bresson - Entretiens et conversations 이부 부르드와의 대담 1974 S.89-사진은 그 무엇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림도 그렇지만, 사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완전히 주관적인 것이지요. 견지해야 할 단 하나의 객관성은 자기 자신과 피사체에 정직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나 자신에게 이 같은 책임을 부과합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진리는 없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관계 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관계, 극도로 복잡하고 복합적인 관계를 설정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단 하나의 중요한 가치인 시(詩)는 회화, 사랑과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알랭 데베르뉴와의 대담 1979 S.109 -찾았다는 말에 이미 뭔가가 있는 거죠. 재발견했다는 뜻일 테니 말입니다. -네, 그 말은 일종의 핵심어 ..
죽어도 하기 싫은 걸 하고 있는 사람, 저요. 분출구가 필요하다. 이 응집된 억울함을 스트레스 라는 가제를 붙여 어디론가 발산해내야만 한다. 공중에서 사라지게하거나, 어딘가에 던져서 터뜨리거나, 저 멀리로 던져버려 시야에서 없애버리거나. 뭘 해야할까? 어떤 방법이 가장 효율이 좋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최근 들어 효과가 좋았던 것 중에 하나였던 운동을 곧바로 떠올렸다. 복싱, 축구, 런닝, 검도, 수영 등등... 배우고 싶은 운동들이 점차 늘었다. 하지만 다 돈이다. 뭔가를 배우려면 다 돈이다. 어렸을 때 언니와 나가서 공짜 축구를 하지 않았던 탓이려나. 풋살 동호회 마저 돈을 내고 들어가야한단다. 무슨 운동이든 그러하듯, 기본기가 중요할텐데, 기본기를 다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 오랜 시간동안 달마다 돈을 내고 배울만할 동기도 딱히 아니기에..
One day, Shout it out loud! 모든 아이의 반항은 아우성이다. 모든 인간은 살고자한다. 그 본능에 복종한다. 끔찍한 사춘기에 저지르는 소소한 악행과, 저주처럼 내뱉었던 단어들도 모조리 아우성이다. 당신이 그토록 바르고 곧은 길만 걷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삐딱선을 제 발로 직접 걸어내는 우직함도 모두 아우성이다. 살려달라는 괴성이다. 온종일 울부짖는 거나 다름 없다. 다 쉬어서 끌끌대는 숨소리의 끝자락이, 그런 울부짖음이 당신에게 닿았을까. 닿았으면 어땠을까? 가끔은 이런 말도 안되는 가정을 해본다. 겨우 그런 어른으로 자랐다. 그 실낱같은 가정 끝에는 조금이나마 덜 상처받은 내가 있었을까, 하고 아직은 어린 나를 달래는 그런 어른말이다.    나는 너를 죽이려했어. 누군가 그걸 말렸고 결국엔 넌 살았지. 아니, 내가 살려냈어.대충 그런..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 <얼룩이 번져 사랑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뭘 사랑한다고 할 땐 정말 사랑하는 것이다.   얼룩이 번져 사랑이 되었습니다  S.63-64  적어도 나는 "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피해 사랑을 표현하는 말과 몸짓의 총화"라는 김혜리 평론가의 묘사보다 정확한 문장을 상상할 수 없다. 에 관한 글을 읽는 건 마치 해변에서 서래(탕웨이)를 찾아 헤매는 해준의 심경을 닮았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이 타인의 언어로 정확히 표현되었을 때 찾아오는 뒤늦은 감격과 후회. 그리고 메울 수 없는행복한 공허. 버티는 길은 오직 또 다른 파도를 만들어내는 것 뿐이다.  · · ·중략 · · ·  먼 길을 돌아 다시 당도한 해변 앞에서 단순한 호기심이 앞선다. 이 사랑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 묻기 전에 해결해야 할 질문. 사랑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끝난 연극에 대하여,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CES NOMS QUI SONT DEVENUS LES NÔTRES)> S.54 한참을 말없이 걷던 세계가 내게 물었다.  -그 날 꽃다발은 왜 준 거야?-꼬시려고.-나를?-응.-왜?-알아봤거든.-나를?-응.-뭘?-널 알아봤어, 세계야.  ···중략···  어느 날 나는 세계를 알아봤다. 극장의 구석진 자리에서 백 장의 포스터를 둘둘 말고 있는 세계를, 모두가 떠난 무대위에서 읽기만 하면 그만인 지문을 달달 외우며 연습하는 세계를 내가 알아봤다. 바보 같은 세계. 포스터를 그렇게 힘차게 말아 놓으면 반듯하게 붙이기 힘들 텐데. 지문을 열심히 외워서 뭐하나? 그냥 읽으면 되는 것을. 그러니까 아무 것도 잘하는 게 없는, 포스터도 잘 못 붙이고 연기도 못 하며 지문도 못 읽는, 그저 잘하려고 애만 쓰는 세계를 나는 알아본 것이다. 그렇게 애써 봐야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