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1 작성
최근(2019) 개봉한 <나랏말싸미>를 둘러싸고 한글 창제의 역사 왜곡 논란이 일었다. 사실 본인은 이미 개봉 전부터 그 논란을 인지하고 있었고, 심지어 왜곡한 것은 사실이지 않냐며 좋아하는 배우의 출연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보러 가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이 시점에서 그것은 곧 나의 편협한 의견이자 서두르는 것에만 급급했던 결론이었음을 인정한다. <나랏말싸미>는 영화다. 영화는 공공연하게 예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선도주자다. 예술은 그것을 하는 이의 주관으로 만들어지므로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나눠질 수도 없고, 그것의 기준으로만 평가되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예술을 예술로 보는, 영화를 영화로 보는 아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문제, 예술로서의 영화의 가치는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서만큼은 논외다. 그 대신에 왜 이 영화가 논란을 일으켰는가에 대해, 그리고 그 논란을 나는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일단 이 영화가 논란을 일으켰다는 것은 사실이다. 논란이 수동적으로 영화에 붙은 게 아니다. 한글창제의 인물이 세종대왕이라는 불변과도 같은 역사를 뒤흔드는 영화를 만들 때 논란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을 리 없다. 왜일까? 남들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은 그 길을 선택하고 숨길 수 있는 것을 굳이 드러내는 것일까? 먼저 논란 자체를 살펴보자면, 그것의 필연성은 가장 먼저 소재의 선택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 한글은 대한민국의 시그니처와도 같이 다루어지는 정체성 그 자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한국만의 고유한 문화이자 재산에 의문을 던지는 욕 먹기에 적합한 시도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한 어리석은 시도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자 동시에 역사라는, 기존에 존재했고 현재까지도 굳건한 큰 존재를 의심하는 발칙한 발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감독은, 이 영화는 왜 신미스님이라는 낯선 존재를, 굳건히 지켜온 역사를 흔드는 위험한 새로움을 제시하는 걸까?
아마도 수업시간에 배웠던 사후기억의 효과와 같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체험하고 이야기하는 사후기억의 목적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기 위함이다. 그 과정으로 과거에 발생되었던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추진력을 갖게 한다. 지금 이 논란의 불씨도 마찬가지 아닐까. 불씨가 커져 과거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이 아니라, 추운 겨울에 유일한 희망과도 같은 따뜻함일 수 있지 않을까.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길이지만 그 길을 걸어가서, 어느 지점에서 뒤돌아보며 이런 길도 있다고 말하는, 그 누군가 에게는 지름길이 될 수 있는 것을 알려주는 시도가 아닐까. 이전에는 알지도 못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논란으로, 언쟁으로 하여금 그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는 오래된 역사에게 새로운 불안함과 미지라는 것이 감히 덤비는, 그래서 논란이 일어나는 이 상황을 이미 보지 않았는가? <게걸음으로> 에서 표현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역사라는 골리앗에게 감히 덤벼보는 다윗 말이다. 관중들은 영화의 관객들처럼 사실이 아니라며, 왜곡이라며 야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의 미하엘과 한나를, 또 다른 익숙함을 언급하겠다. 화를 내던 한나와 어리둥절했던 미하엘, 달랐던 둘. 그래서 싸울 수 없었던 둘처럼, 사실 판단과 내가 분석하는 이 영화의 논란은 다르기 때문에 어귀가 맞지 않은 바퀴로 싸움의 굴레로 진입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논란을 다룰 때 사실이라는 판결과 옳고 그름의 논쟁의 방향성으로만 치우치면 안 된다. 우리는 문학을 하는 이고, 배우는 이들이다.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고, 계속 질문하며 새롭게 다루는 이들이다. 굳고 위엄 있는, 이제껏 미지의 가능성이란 것이 접근하지 못했던 역사라는 큰 존재에게도 질문해야 한다. 역사는 변하지 않고 고정됨으로써 권력을 가진 존재로, 그 힘은 지금까지도 굳건하다. 그러한 기존에게, 권력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것은 문학을 하는 이로서 무책임한 방관일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질문하는 것, 완전한 낯설음도 제시해보는 것은 기존에게 대항하는 힘을 발전의 발돋움으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것을 이미 자행해왔다. 다다이즘과 바우하우스, 그리고 사후기억을 하는 문학작품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모토를 작동시켜 지금에 다다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힘이다. 도전이다. 이 영화의 논란은 한글 창제, 세종대왕이라는 이 모든 큰 존재감을 ‘알면서도’ 그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위험한 불씨를 던지는 것과도 같다. 크고 오래 지속되어 힘의 일부가 되는 영광, 왜곡되지 않고 보존되어야 마땅할 역사는 아무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얇고 약한 유리 파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굳세고 단단하기에 이런 불안함과 불편함을 담은 새로움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존재의 등장은 위태위태하고 불안하며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잊혀졌고 모두에게 잊혀질 수 있는 것을 기억해내는 몸부림이다. 모두에게 공평한 역사는 속된 말로 이미 한자리 차지하고도 남았으니, 라고 말하며 남은 여러 가능성의 공백을 최대한 메우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런 노력은 역사가 가진 사실성으로만 판단될 수 없기에 수많은 논란의 여지를 안고, 우리는 그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계속 자행해 나가야 한다. 낯설기에 그에 동반되는 거부감을 알면서도,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는 그 발걸음에는 힘이 있다. 과거를 과거에만 두지 않으려는, 과거를 현재와 비교해서 반성하는, 더 나아가 미래의 방향성까지 견지해보는 힘. 우리는 이처럼 계속 질문함으로써, 논란을 일으키면서까지 계속 생각함으로써 호기심으로도, 용기라고도 불리 우는 그 힘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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