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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연말연초 헤이터인가에 관한 고찰

 

 

 12월부터 밝혀지는 조명들, 꼼꼼하게 혹은 대충 두른 목도리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온기, 살짝은 두툼한 두께의 양쪽 장갑이 맞물려 비는 소원들. 어쩌면 나는 그런 것들을 싫어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온갖 사람들이 다같이 행복할 수 있는 얼마안되는 그 며칠의 온기는 어떻게 보면 꽤나 희귀한 것이고, 마땅히 기뻐해야하는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실체 없이 그 행복한 '무드' 속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지난해의 나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나를 또 다짐하는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부담이고 유난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동의할뿐. 그저 평범한 하루처럼, 12월 25일 00시 00분이 4월 13일 오후 9시 38분과 똑같은 것처럼. 딱 그 정도로 별 의식없이 지내고 싶은 나이건만, 그저 연말연초 헤이터라는 쉽고도 우스운 별명을 자칭한 채, 12월 31일 오후 11시가 다 되가는 때에 글을 쓰고 있다. 

 

'새해 다짐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해 다짐으로 정한 올해 초의 나. 아마도 알량한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내 새로운 다짐을 공유하고 싶지도 않고, 행복할 미래만을 희망차게 바라보며 내가 그렇게 해낼 것이라고 믿는, 그런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는 말을 어느정도 실감하는 나이가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나의 회피를 비관적으로 둘러댔겠지. 그래. 12월 31일의 나는 364일 전의 1월 1일의 나를 이해한다. 언제나 싱클레어로 살겠어 라고 다짐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내 안의 알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 게 전부니까. 이토록 여전히 나는 알을 '발견'한 자에 불과하니까. 근데 언제쯤 내가 그 알의 안의 연약한 새임을 받아들이고, 결국엔 알을 깨고 나와, 과연 날갯짓을 하고 날아갈까? 꼭 날아가야할까? 꼭 성장하고 발전해야하나? 그런 의문도 든다. 그게 결국엔 연말 연시 희망찬 안부인사와 같이 부담스럽게도 느껴지기도 한다.  근데, 나는 그러고 싶다. (그러고 싶은 것 같다, 가 더 자연스러운 구어임에도 불구하고 ~한 것 같다, 라는 표현을 지양하는 나로서는 조금 더 결연을 담아 점을 찍었다 하하) 나는 절대적으로 발전한 인간이 아닐 수 있지만, 성장하고 싶어한다. 앞으로 나아가되 결코 빠르거나 가속도가 붙지 않음을 누군가를(무언가 어쩌면 나를) 원망하지 않고, 과거의 내가 잘못 생각한 것에 대해 무조건 적인 힐난이 아닌 그땐 그래서 그랬지 라고 인정과 위로를 해주고 싶다. 아니, 그럴테다. 그렇게 하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나면 비로소 나를 돌볼 줄 아는 인간이 되었을테고, 그제서야 남을 위하려 주변을 봤을 땐 너무 늦었을 수도 있겠다. 그때는 또 그랬던 나에 대해 반성하고 나를 이해하겠지?

 

 

 

 새해에만 국한되는 다짐을 하기 싫어 기간을 무한정이라고 쳐보고 다짐을 한다 치자. 나는 어떤 인간으로 자라야하는가? 에 대해 고찰하기 전에 나는 어떤 인간인가? 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나는 이제껏 나의 노력으로 무언가를 얻은 자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주변인들은 아니다, 너 정말 열심히 살았다, 라고 말해주지만서도. 나는 안다. 정말이지 나만큼은 안다. 나는 결코 열심히 살지 않았고, 열심히 하지 않았다.

 

내 인생엔 치열함이 부재했다.

언제나 적당히 했고, 적당히 해도 될 만큼만 했다. 그런데도  언제나 그 이상의 결과물을 (혹은 보상이라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받았고, 그걸 퍽이나 만끽하며 살았다. 어느 순간에는 그래, 내가 성취해낸 게 맞지 라며 기가 차는 인정을 할 때도 있었다. 사실 그런 일련의 과정과 결과들은 나에게 편안함과 안락함만을 쥐어주었기에 항상 '아, 더해야지.' '알아, 내가 더 노력해야지.' 라는 말버릇만을 되풀이하며 그 편안에 취하고 그 속에서 안주했다-그리고 여전히 그러고 있다. 

 

 

*새해 다짐이 왜 싫은가 에 대해 생각하다가 다짐을 하는 내가 우습긴 한데, 앞에 말했듯이 이건 새로 다가오는 365일 유한한 다짐이 아니니까 이정도 모순은 귀엽다 생각하고 넘어가주도록 하자. *

 

 

 이제껏의 말버릇처럼 '하면 안돼' 혹은 '뭔가를 해야 해.' 라는 건 나란 인간에게 딱히 어떠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그런 말들은 어떠한 자극성도 없고, 도파민도 아니고, 실체 없이 뜬 구름에 죄책감만을 실어 무거워지는 밀린 숙제일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1. 대전제를 바꾼다.

 

뭔가를 해야한다-한다 / 해서는 안된다-하지 않는다 -> 이 전제 를 바꾸는 거다. 

 

나는: 미친듯한 곤조과 고집으로 오기있게 살아가는 인간은 아닐지언정, 지가 하고 싶은대로는 해야한다. 안그러면 일명 '꼬라지'를 내며 후회하고, 화내고, 또 후회할 짓을 반복하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싶은 걸 하자.

 

-> 뭔가를 하고 싶다. 한다.

-> 뭔가를 하고 싶지 않다. 하지 않는다.

 

바뀐 대전제 틀안에 새로운 재료를 집어넣자. 흐물거려서 어디로 흐를지도 모르는 이 불안과 불확실성을 저 틀안에 넣고 굳히자.

 

나는 나에게만큼은 떳떳하고 싶다.

나는 나에게만큼은 창피하고 싶지 않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다. 말은 쉽다.

 

 

 근데 하는 게 어려워도 이제는 좀 하련다. 어려운 걸 맞닥뜨렸을 때 당황하고, 실수하고, 후회할 지언정. 그건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고, 나로 인한 후회가 아님을 다행이라 생각하련다. 이제껏 노력하지 않은 것에 비해 넘치는 편의 안에 안주한 것에 비례하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어려움과 고난이 앞으로 예약되어있음을 인지(정도까지는)하고 있다. 나는 현자도 아니고, 싯다르타처럼 모든 것을 다 앎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반대의 세상의 것들을 겪으려 도전할 수 없고, 골드문트처럼 자신의 온 사랑과 존경을 줄 수 있는 자를 떠나 밑바닥의 것들을 다 경험하는 용기도 없다. 그래서 앞으로 예약된 그것들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넘길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껏 편하게 살았던 만큼, 앞으로 예측하기도 어려운 난관이 왔을 때 그걸 다 겪어내고 고통스러워 해야지. 적어도 그 정도의 예상을 하는 마인드셋은 할 수 있잖아. 이제껏 행복한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앞으로는 정말 행복하지 않은 일들이 올테고, 후회하지 않으려 살고 있는 나는 그때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후회할 수 도 있겠지. 근데 적어도 그걸 다 이겨내자, 뚫자, 받아들이자. 이런 뜬구름 잡는 희망을 갖고 살지는 않으련다. 그냥 내가 그걸 다 '겪고'나서, 그러고나서도 살아만 있다면, 그걸로도 잘 했다고 나에게 말해주자. 알 끄트머리를 조금 깼다고, 나의 기준에서는 내가 어느정도 성장했다고 인정해주자. 그게 내 새로운 다짐이다. 

 

죽음을 동경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언제나 나를 말라 비틀어 버리는 것에 이용했잖아. 이제는 살아내는 것, 20대 초반에 내가 적어냈던 삶과 사랑에 관한 글자들이 나에게 알알히 박혀 "나 살아남았어!" "여전히 살아있어!" 라고 외칠 수 있는 힘의 양분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언젠가 비로소 그렇게 외칠 것이다. 남들에게는 비루하고, 딱히 잘나지도 않았으면서 유세 떤다 라고 욕먹으면서도 웃으면서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그것에 만족한다고.

 

나는 그럴 것이다. 난 하고 싶어. 난 해~~

 

공부를 많이많이 합시다 ! (다시) 하고 싶어해라 좀 ! 

글도 자주 씁시다(..)